쿤매(어머니)를 찾아서...
 


라차담넌 거리에서 시작하기로 하였다.
그곳에 재향군인회가 있었다.
재향군인회 사무실에 앉아서 나는 내 이야기를 듣고
난감한 표정을 짓는 직원의 얼굴을 보면서 황망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도 나는 엊그제 일처럼 가슴에 담고 있는데,
그들은 수많은 장군들의 파일을 가리키면서
이십년 전 돌아가신 쿤퍼(아버지)찌까위 겟싸꼬몬 장군의 이름을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궁리 끝에 몇 번 간 적이 있는 한국참전용사회를 찾아가 보기로 하였다.
한국참전용사회의 주소를 적은 종이를 내밀며 뚝뚝이(쌈러) 요금은 40밭을 주면 될 거라고 일러준다.
외국인이 당하는 바가지 요금에 대한 배려이다.
차가 달리는 동안 혼란스러웠다.
내가 알기로 겟싸꼬몬가(街)는 우리나라의 용산과 같이 군부대가 많은 지역이었다.
향군에 근무하는 사람이 겟싸꼬몬을 모르다니... 어쩌면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쿤매가 나를 꼭 기다릴 거라는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십년의 세월은 단지 내 마음속에서만 엊그제로 기억되고 있음이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삼십분 가량을 달려 도착한 한국참전용사회에서는 더욱 기대할 것이 없었다.
그 동안 생각해 두었던 전화번호부 찾아보기가 고작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처음의 심정과 다르게 가능성이 없어 보일수록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박해 지는 것이었다.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그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겟싸꼬몬가(街)에 있는 전에 사시던 집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쿤퍼 찌까위 겟싸꼬몬과 쿤매 쏨야, 외동딸 떵, 그리고 셋째아들 뜨리를 만난 것은 1975년 늦여름이었다.
육군 중장이셨던 쿤퍼는 육이오 참전 용사로 정부 초청을 받아 가족들과 우리나라를 방문중이었고,
나는 태국에 유학 갈 예정인 학생으로 환영 리셉션에서 만났다.
생각지도 않게 태국어를 할 줄 아는데다가 태국 정부 장학금으로 명문 쭐라롱껀대학에 유학 예정이라는
것만으로 참가자 모두가 환대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퍼매(부모)는 유난히 사람들이 좋았고 나와 같은 나이의 내성적인 딸 떵과 친하기 바랐다.
이년 뒤 방콕에 도착하자 퍼매는 자기 집에 같이 살기를 원했다.
식성이 까다롭던 나는 처음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별로 없었고, 규율이 엄한 기숙사이긴 했으나 부모 떠난 자유를 누려보고 싶어 거절하였다.
그분들은 치안이 불안한 까닭에 태국내에서의 보호자이기를 원하였고 부모가 되어 주마고 하셨다. 어떠한 절차나 약속이 있었던 건 아니다.
퍼매는 나를 위해 육남매와 오빠들의 약혼자들까지 동반한 가족여행을 다녀오는가 하면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기숙사로 딸 떵과 막내 떤과 함께 찾아와 맛있는 음식을 사준다던가 근교에 가 볼만한 곳을 데리고 다녔다.
그 집 넓은 홀에서 일주일이 멀다하고 열리는 파티에도 가족으로 빠짐없이 초대되었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그 상황에 적응할 수 없었다.
낯선 사람들 앞에서 자랑스러워하는 퍼매와 달리 그곳에 모이는 몇몇 귀족들로부터 받은 모멸감 같은 것이 싫었다.
나는 그들이 나를 일본인으로 알고 다가왔다가 한국인이라면 보이는 야릇한 미소 속에 실망의 빛을 보았다. 그 때 태국은 우리가 아는 태국과 모든 면에서 달랐다. 처음으로 내 나라를 생각했고 내 위치를 생각했다.
심한 회의에 빠지면서 퍼매께도 소홀했다.
쿤매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과일을 준비해 놓고 오라는 연락을 해와도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그래도 두 분께서는 큰스님으로부터 수호의 뜻이 담긴 금 목거리를 받아다 주셨고,
가족들은 어쩌다 가도 분에 넘치게 반겨주어 그들의 변함없는 사랑에 몸둘 바를 몰랐다.
" '78 아시안 게임"인 국가적인 행사에 유학생들은 제일 먼저 차출되었다.
그렇게 많은 운동 선수들을 직접 본 것도 그들이 얼마나 애국자인지도 처음 알았다.
북한을 이기고 중국 일본에 이은 3위 입상은 한국의 위상을 바꿔 놓고 있었다.
선수단이 온통 휘몰아치다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돌아갈 날 두 달을 남기고 뒤늦은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을 때 쿤퍼의 사고 소식을 들었다. 지방 시찰 중 빗길에 차가 전복되었다 했다.
슬픔인지 죄스러움인지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달래며 정부 소유의 그 집에서 곧 이사해야 할거라고 쿤퍼의 영정 앞에서 찍은 가족 사진 뒤에다 가족들의 이름을 적어 주시면서 몇 번이나 잊지 말라고 당부 하셨었다.
지금 그 사진을 들고 옛집을 찾아가는 것이다.
후회와 그리움 섞인 슬픔 같기도 설레임 같기도 한 묘한 감정 속에 쿤매를 만나는 장면을 상상했다. 저만치 수로를 따라 담장이 보이고, 겟싸꼬몬 다리(橋)와 겟싸꼬몬가(街) 팻말이 보이면서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대문 옆에 초소가 있는 것도 옛날과 다름이 없는데, 집은 오층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군복을 입은 보초에게 이십년 전 이 집에 살던 가족을 찾아 왔노라고 했다.
얼굴을 뻔히 쳐다보던 보초가 중년의 남자를 데리고 나왔다.
사진을 보여주며 찾는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지만 한참 듣고 나서 이 집은 정부에서 사용하고 있어서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엉뚱한 대답이었다.
이런저런 설명을 해도 무조건 모른다고 철문을 닫으며 돌아서는 그 남자 뒤로 "70/25번지 겟싸꼬몬"이라는 문패가 보였다.
"잠깐만이요." 절박하게 불러 세웠다. 문패를 가리키며 같은 성을 쓰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만나게 해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
퉁명스럽게 이름밖에 적혀있지 않다고 핀잔을 준다.
나는 결연한 태도로 쿤매가 혹시 연락이 끊겨도 이름을 알면 찾을 수 있다고 적어주셨다며 성이 적혀 있는 곳을 짚어 주었다.
사진을 받아들고 남자가 안으로 들어갔다.
달리 찾을 곳이 없으므로 이곳에서 해결을 봐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책임자인 듯한 군인이 그 사진을 들고 나와 몇 가지 확인을 하고는 사진 속의 큰오빠와 연락을 해보겠단다.
초소의 창구를 통해 물 한 컵이 나오고 움직임이 분주해 졌다.
조금 전의 그 군인이 나와 깍듯한 태도로 오빠와 연락이 되었다며 안내하겠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무엇이라 설명할 수 없는 그 감정으로 인해 뜨겁게 느껴지는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 내렸다.
대문이 열리고 차가 나왔다. 바로 길 건너 부대에 오빠가 있었다.
어떻게 찾아 왔느냐?, 고생하진 않았느냐?
반가워 어쩔 줄 모른다. 자리에 앉자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결혼을 했다고 하자,
성을 그대로 쓰고 있어서 결혼을 하지 않은 줄 알았다고 하셨다.
아이들의 이름을 물을 때까지 예상했던 대로 이십년의 공백은 없었다. 그러나 마음 뿐 이었다. 쿤매를 만날 수 없음을 알았을 때 너무도 긴 시간이었음을 통감하고는 흐느낌을 억제할 수 없었다.

"쿤매 살아 계실 때 네 이야기를 많이 하셨고, 돌아가셨을 때 연락할 방법이 없어 안타까웠다."

잠깐 머리 속이 텅 비는 느낌이 들면서 아무 것도 궁금하지 않았고 물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쿤매는 내게 남겼던 몇 자의 글씨들과 사진으로만 남았다.
그러나 그토록 잊지 말라던 당부의 말씀은 형제의 연(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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