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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부사태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양어대학 태국어과 40주년 기념

태국학 대학생 학술 세미나

태국, 남부 무슬림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

200500975 김 혜 란

I. 서 론

II. 본 론

(1) 태국 남부 사태 역사적 배경

(2) 무슬림들의 정체성

(3) 폭동지역 피해사례

(4) 태국 남부유혈사태& 쿠데타 직전의 정부와 그 후의 정부

(5) 무슬림의 입장

(6) 일반 태국인들, 승려들, 테러에 참여하지 않은 무슬림들의 입장

(7) 쿠데타의 배경이 된 탁신정권과 군부세력의 정치적 갈등

(8) 태국-말레이시아 간의 관계

(9) 다른 나라 분리주의 운동의 성격과 해결방법

Ⅲ. 결론

Abstract

최근 태국에서 1992년 이후 15년 만에 19번째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태국 정세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부를 실정을 이유로 군부가 힘을 앞세워 법에서 정하지 않은 절차로 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은 민주주의의 심각한 침해라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탁신 친나왓 총리의 축출을 가장 반기는 지역은 태국의 남부, 얄라 파타니 나라티왓 등 이슬람 신자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3개주이다. 그동안 탁신이 내세우는 불교민족주의가 남부 무슬림의 인권 탄압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2년 전부터 계엄령 상태에 있는 이 지역은 최근 조사에 따르면 2004년부터 지금까지 태국 남부 3개주에서 일어난 이슬람 분리주의 과격파의 공격으로 모두 천7백여 명이 숨졌으며 2천5백여 명이 부상한 것으로 집계 되었다. 얼마 전 태국 과도정부 총리로 취임한 수라윳 신임 총리는 10월1일 취임사에서 “(정부의) 부정부패가 정치문제와 태국 남부 이슬람 분리저항 활동, 2가지 문제를 야기 시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민통합이 요구된다. 모든 사람이 문제 해결에 동참해줄 것을 촉구한다,”고 역설 했다. 이처럼 태국 남부 문제가 국제 사회의 이슈로 부상하면서 끊이지 않는 분쟁의 원인을 규명하고 태국 남부사회를 이해하고자 한다.

Ⅰ. 서론

현재 태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문제 중의 하나는 남부지방에서 발생하고 있는 폭탄테러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태국 정부는 지금까지 17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남부 이슬람 지역 분리주의 폭력사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계엄령을 내리고 경계를 철저히 하고 있지만

지금도 거의 매일 같이 총격사건이나 폭탄테러가 일어나고 있다. 이런 관계로 관광객들은 남부지역 여행을 꺼리고 있으며 쓰나미 피해 복구도 늦어지고 있다. 예년 쏭끄란 축제기간에 많이 찾던 인접국 말레이시아 관광객조차도 발길을 끊은 상태고 최근 발표된 국립대학 합격자 발표에서는 남부 지방의 대학을 지원했던 지원자들과 학부모들은 합격을 포기하는 상태가 발생하면서 지역경제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이다.

불교도가 대다수인 사회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고 있는 태국 무슬림은 자신들이 ‘2류 시민’으로 소외되고 있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이슬람 무장 세력의 분리 독립 운동은 한동안 잠잠 했다가 2003년부터 다시 격화됐다. 불교도를 타깃으로 한 테러가 많이 발생함에 따라 남부지역 승려들이 상당수 사찰을 떠났으며, 일부 불교 학교 교사들은 방탄조끼와 총기로 무장한 채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특히 남부 3개주에 적용되고 있는 비상사태 법에 따라 영장 없이도 용의자를 구속하거나 가택수사를 하고 있어 남부지역의 인권침해가 위험수치에 다다른 실정이다.

최근 쿠데타로 남부 지역의 분위기가 안정되었지만 아직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지난 9월 쿠데타를 이끈 손티 장군이 남부 지역에서 연속적으로 발생한 폭동의 배경에는 “이슬람 무장 세력에 의한 독립국가 수립의도가 있다” 고 지적하면서 남부에서 계속되는 폭동을 해결하기 위해 이슬람 무장 세력에 대화를 제의하는 등 탁신의 강경책과는 다른 방안이 거론되면서 남부 사태는 태국의 민주주의와 함께 해결되어야할 화두로 떠올랐다.

Ⅱ. 본론

(1) 태국 남부 사태 역사적 배경

태국 남부에서 벌어지는 유혈 사태는 역사적으로 긴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 갈등의 뿌리는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시작된다.

태국 남부지역은 역사적으로 타이족이 살던 지역이 아니라 말레이 계통 무슬림들이 대다수인 '파타니' 독립왕국 이었다.

파타니 왕국은 타이인들의 지배를 거부하여 1560년대에 당시 태국의 수도인 아유타야에 군대를 이끌고 올라와 왕궁을 약탈했다. 17세기에도 남부 지역에서 말레이계 왕국들과 태국 간에 전쟁이 계속 일어났으며, 그 소요의 진원지는 언제나 파타니였다.

이후 1909년, 말레이시아가 영국의 식민지로 되면서 파타니는 태국의 영토로 확정되었다. 결과적으로 불교도가 95%인 태국에 인구의 3.8%에 불과한 이슬람교도가 주민의 80%를 이루는 남부 이슬람 사회가 탄생한 것이다. 강제로 합병된 이슬람 사회가 순조롭게 동화될 리 없었고, 남부지역 주민들은 여전히 말레이시아에 정서적인 가까움을 느끼면서 이슬람 종교를 계속 유지하며 자치독립을 요구하는 반군활동을 계속했다.

이에 태국 정부는 파타니를 태국에 완전히 동화시키기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하는데, 이는 특히 1940년대부터 강력히 추진되었다.

이후 1940년대, 태국 정부는 국민통합정책을 강조하면서 이 지역을 태국에 완전히 동화하는 작업에 박차를 가하며 문화적 독자성에 일부 통제를 가하였다. 자신들의 언어와 전통이 말살될 위기에 놓이면서 남부지역 주민들은 자신들이 이방인 취급, 심지어는 2등 국민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하였다.

1948년 이 지역에서 일어났던 무장독립운동 진압과정에서는 약 400명의 무슬림들을 죽이기까지 한다. 이에 남부주민의 일부는 독립 국가를 재건하겠다는 저항의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 태국은 정책의 방향을 조정하여 분리주의 정책에서 포용정책으로 방향을 전환시켰다. 물론 남부주민들이 느끼는 차별감은 알게 모르게 계속 되었지만 말이다.

이어 2001년에 출범한 탁신 정부는 무슬림과의 대화에 소극적, 회피적인 모습을 보여 남부지역 무슬림들의 소외감은 증폭 되었다. 이들은 태국정부가 포용정책 보다는 배제 정책을 강화한다고 느끼기도 하였다. 탁신 총리는 남부 지역 무슬림들이 이슬람 테러 단체들과 연계되었다며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이며 무력 강공책을 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무슬림들이 탄압을 당하고 이슬람 사원도 파괴됐다. 말레이시아 관광객에 의존하는 남부경제도 직격탄을 맞았으며 대부분의 학교(2천 5백여 개)는 휴교에 들어가기도 했다. 무슬림에 대해 이러한 정책을 추진하던 탁신 총리는 선거를 앞둔 시기에 시민과 학생을 동원하여 평화의 종이학을 남부지역에 날렸으며, 막대한 돈을 내세워 남부 경제 회생이라는 공약을 걸어 속이 내다보이는 전시용 정책이라는 비난을 사기도 했다.

(2) 무슬림들의 정체성

민족의 정체성은 가장 중요한 문제다. 말라유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 즉, 그가 누구고 어떤 특징을 갖고 있고, 어떻게 다른 사람과 다른가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이러한 것들은 그 그룹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반영되어 있다. 예를 들면, “ ออ

แฆนายู “(Orang Malayu) 라는 말은 그들이 그 자신을 스스로 부르는 말이다. 뜻은 ”나는 말라유 사람이다.“ 라는 뜻이다. 어떤 때는 ” กีตอออแฆนายู “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우리는 말라유 사람이다. “ 라는 뜻이다. ”กีตอ“ 라는 말은 ”เรา“ 라는 말보다 더 ‘우리’란 의미를 강조한 단어이다. 어쩌면 듣는 사람을 포함하거나 포함하지 않을 수도 있다. 위와 같은 문장의 의미는 말라유 계열의 사람이면 말라유 사람이고, ‘บาอ’라고 불리는 말라유 말을 하고, 이슬람교를 믿고, ‘ อาต็ะ ’라고 불리는 말라유의 풍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을 자신들의 가치관으로 생각한다.

“ออแฆซีแย”(Orang siam)이라는 말은 태국 사람을 의미한다. 말라유 사람들이 언제든지 “ออแฆซีแย” 라고 하면 불교를 믿고 불교와 동화된 태국인의 습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 ออ

แฆนายู “ 는 태국사람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곧 종교를 버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사회에서는 “ออแฆนายู“ 라는 말은 “ออแฆซีแย”와 반대되는 말이다.

“ออแฆจีนอ”는 중국사람 즉, 중국종족이며 중국어를 말하는 화교를 의미한다. 말라유 사람들은 이 “ออแฆจีนอ” 와는 다르다고 알고 있다. 그 스스로를 말레이시아를 의미하는 말레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중국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말레이 종족 중에 방콕에서 이슬람교를 믿고 사람들을 “ ออแฆนายบาเกาะ”라고 부른다. 이들은 강제로 이주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말라유 사람은 아니다.

말라유 사람들은 무슬림이라는 것과 갈라질 수 없다. 하지만 무슬림의 특성은 하나의 종족일 필요는 없다. 그들의 각각 지역으로 나눠져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른 지역에 살면 다른 풍습을 가지게 된다. 풍습이 라는 것은 무슬림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족의 중요한 요소이다. 따라서 말라유 사람이 된다는 것은 종족 풍습 종교 이 모든 것이 어울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불기 2544

불기 2544

파타니

얄라

나라티왓

합계

인구수

종교

남자

여자

합계

이슬람(백분율)

불교(백분율)

301,982

310,287

612,269

80.75

19.25

222,310

220,730

443,040

76.53

23.47

334,191

335,618

669,809

79.60

20.40

858,483

886,635

1,725,118

78.96

21.04

<표-1 남부 3개주 인구수, 종교비율>

(3) 폭동지역 피해사례

지난 2004년 태국남부에 거주한 이슬람교도들이 군부대와 불교사찰을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그 이후로 계속 테러와 강경진압이 반복되는 가운데 사망자가 1700명이 넘어섰다.


<그림- 이슬람 비상사태 선포지역 >

말레이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태국 남부지역으로 가는 길. 남부 이슬람 4개주 중 송클라를 제외한 3곳(그림 1에서 보이는 붉은 부분)이 바로 비상사태가 선포된 곳이다. 이곳들은 불교사찰의 방화부터 승려의 총살, 신성시되는 불상의 참수형 테러 등 불교 사찰을 표적으로 하는 테러가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노골적인 종교모독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과격세력의 승려를 노리는 폭력사태로 매일아침 행하는 탁발이 이러한 행위들에 노출되어있다. 탁발이란 신도들이 승려의 생계를 책임지는 불교의 전통을 말하는데, 아침마다 승려들은 테러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무장군인들은 그림자처럼 매일 동행하게 됬다. 승려들뿐만이 아니라 탁발을 돕는 신도들 또한 테러의 표적이 되고 있다.

남부사태는 점점 악화되고 있다. 남부 유혈사태의 기폭제가 된 사건은 2004년 10월 25일에 있었던 대규모 무슬림 시위. 이것은 무기소지의 의심을 바다 구속된 지역주민의 석방을 요구하던 시위였지만 정부의 무조건적인 진압으로 시위대 85명의 희생자 사망했다.

정부의 강경대응은 오히려 무슬림의 결속을 다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더욱 깊어진 정부불신은 더욱 과격해진 테러행위로 이어지고 있다.

2004년 이후 급격히 늘어난 폭력사태로 사망자는 1500명이 넘어섰다. 무슬림들의 테러의 표적은 정부지만 희생자는 지역주민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슬림의 과격 폭력은 지역주민 공포의 대상이다. 무장한 군인들의 총은 평범한 무슬림을 의심하여 공격하기도 하고, 그야말로 폭력의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다. 주민들이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에 서로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결국 태국남부 폭력 사태는 지역주민 모두가 피해자가 될 수 밖에 없다.

<표-2 태국 남부지역 테러 발생빈도>

(4) 태국 남부유혈사태 & 쿠데타 직전의 정부와 그 후의 정부

1980년 후반부터 분리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하여 2001년 탁신정부가 발족하면서부터 폭력사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태국에서는 2004년 4월 120명이 숨지는 충돌이 있었고, 인도네시아에서는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간 유혈충돌이 빚어졌다. 2004년 4월 28일 태국 남부 이슬람 거주지역에서 이슬람 무장세력이 15곳의 경찰서와 군 검문소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 최소 120명이 사망했다. 종교분쟁 성격을 띤 유혈사태가 번지자 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말레이시아는 즉각 국경 경비를 강화하는 등 인근 국가에도 불똥이 튀었다. 무장세력은 무기를 탈취할 목적으로 군사시설을 조직적으로 기습한 것으로 알려져 종교 분쟁이 또 다른 대형 테러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우려가 확산되었다. 이로인해 많은 피해가 발생하자 정부는 강경책을 내세웠는대 무장세력 중 일부가 이슬람 유적지인 크르세 사원으로 피신하자 이들을 향해 로켓포를 발사하여 모두 살해했다. 크르세 사원폭격과 더불어 또 발생한 학살이 있는대 이는 7명을 현장에서 살해하고 78명을 체포해 압송하던 중 숨막혀 죽게 했다는 ‘탁바이 대학살’로 이미 현장에서 1200여명을 체포해서 웃통을 벗기고 개처럼 땅바닥을 기게 했을 때부터 예견된 사건이었다.

타이 남부지역의 폭력사태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자 타이가 전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타이족만의 나라가 아니라 중국계, 말레이족, 라오족, 몬족, 여러 고산족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다종족 사회임을 재인식한 시민사회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다종족 민주주의’를 고려하기 시작했다.

남부지방에 2명이 해군이 무슬림마을에서 잡혀 살해된 사건에 대해서 탁신수상은 꼭 범인들을 잡아들이겠다고 색출에 혈안이었다. 이에 대해서 국가재건위원회에서는 정부에 보복을 살 수 있는 행위는 자재해야 한다는 충고를 했다. 탁신수상은 해군을 살해한 범인들에 대해서 야생동물이라고 부르면서 야생동물을 잡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국가재건위원회의 아난위원장은 범인체포도 중요하지만, 범인 색출을 핑계로 또 다른 보복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시나왓 탁신 태국 총리는 그 전 2002년 7월 남부 3개 주에 계엄령을 내렸다. 이 계엄령은 비상사태에 영장 없이도 용의자를 구속하거나 가택수색을 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태국과 필리핀 남부에서도 이슬람 종교학교가 공급원이다. 태국 정부는 1999년 이슬람 종교학교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아직도 300여 곳이 은밀히 운영 중인 것으로 추산된다.

태국 군부가 2006년 9월19일 오후 10시 30분쯤 TV방송국 '채널 5'를 통해 쿠데타를 선언했다. 10대 이상의 탱크가 방콕 도심에 진입해, 정부 청사 건물 주변의 도로를 봉쇄했으며 이미 총리 관저를 접수했다. 이번 쿠데타는 최초의 태국 무슬림 출신의 쏜티 장군이 주도한 것으로 19일 발생한 쿠데타에 이르는 과정에서 안보정책을 둘러싸고 탁신 친나왓 총리와 공개적으로 충돌해 왔다. 그는 2004년 1월 이래 1400여 명이 사망한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이슬람 시민군과 대화를 주창했으나 어떠한 협상 가능성도 무시하는 정부에 의해 좌절됐다. 손티 총사령관은 1969년 군사학원을 졸업해 왕립육군보병단에 배속되었으며 그 후 특전사령부 등 주요 부대를 이끌었다. 최근 들어 그는 태국의 정치적 교착상태에 개입해 지난 1년간 태국을 혼란에 빠뜨려온 위기에서 푸미폰 국왕의 비공식 목소리로 행동해 왔다. 정부에서는 계속적으로 대항하고 있는 쏜티 장군을 쿠데타로 인한 불안한 정세를 회복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후 태국 육군총사령관과 합참의장을 역임한 수라윳 출라논 태국 추밀원 고문이 1일 24대 총리로 취임했다. 과도정부를 이끌게 될 수라윳 총리는 각료 35명을 임명, 국정을 관장하고 내년 10월 총선 전에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 2006년 10월 9일 태국 군부로부터 국정을 넘겨받을 과도정부 내각 명단이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승인을 받아 발표되었다. 태국 과도정부는 총선이 실시되는 내년 10월까지 1년간 국정을 맡게 되며 앞으로 6개월 이내에 신헌법을 제정할 책임을 지게 된다. 수라윳 총리는 남부의 많은 이슬람교도가 불교 국가 태국에서 이류 시민으로 취급받고 있다며 앞으로 정부는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앞으로의 정부 노선이 주목된다.

(5) 무슬림의 입장

타이족이 현재의 태국에 정찰하기 전부터 있던 남부의 빳따니 왕국은 쑤코타이 왕국 이후 태국의 영토로 합병되면서 자치권을 인정받아 고유의 문화와 종교, 언어를 고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쭐라롱껀 대왕의 행정개혁으로 중앙정부가 지방 영주들의 권한을 축소시키고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태국인 관료들을 무슬림 지역의 영주로 대치시키면서 태국 무슬림에 대한 강압적인 동화정책을 시도했다. 그 결과 무슬림들은 자신의 종교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정부에 대한 투쟁을 하기 시작했다.

태국정부와 타이무슬림 간의 갈등은 1960년대 이후 태국정부가 타이무슬림사회에 완전한 종교적 특권의 부여, 교육기회의 확대, 그리고 다양한 경제적 지원 등을 통한 통합정책을 실시해오면서 많이 해소되었다. 그러나 일부 이슬람 무장 세력의 게릴라 활동과 소요 사태는 간헐적으로 지속되어 왔다. 특히 2004년 1월에서 3월 사이에 관공서, 군 및 경찰 시설에 대한 무장게릴라의 단발성 공격이 잇따라 55명이 목숨을 잃는 등 치안상황이 악화되자 태국정부는 남부 세 개 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 병력을 투입했으나 이슬람 지도자의 무차별 체포 등으로 반발이 커지는 등 과잉 진압 문제가 국제사회에 대두되기도 했다.

태국총리 탁신이 내세우는 불교민족주의가 남부 무슬림들의 인권탄압으로 이어져 남부 무슬림은 물론 각국으로부터 비난을 샀다. 탁신은 지난달 6일 치러진 총선에서 압승해 태국 사상 최초 연임총리가 됐다. 탁신총리의 타이락타이당은 하원의석 5백석 가운데 3백75석을 차지해 1932년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태국 현대사에서 최초로 단독정부 구성요건을 갖추는 신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남부 무슬림 3개주 분쟁지역 11석 가운데 타이락타이당이 단 1석도 건지지 못한 채 전멸한 것은 남부 무슬림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배타적인 불교민족주의는 지난해 4월 이슬람 성지이자 유적지인 크르세 모스크에 피난 중이던 무슬림을 폭격한 사건을 계기로 무슬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이후 정부는 복구 작업을 했지만 이슬람의 성지에서 폭격을 한 것 자체로 무슬림의 분노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25일에는 남부에서 이슬람교도들이 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체포되어 트럭에 태워져 이동하던 중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 6명을 포함해 모두 질식사 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날 시위와 대량 질식사건은 젊은 이슬람교도 2000여명이 나라티왓주 타크바이 지구 경찰서 바깥에서 억류 중인 동료 6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시작됐다. 경찰과 군대는 이들 시위대를 향해 공포와 물대포, 최루가스를 발사하면서 강제 해산하려 했고 1300여명을 6개 트럭에 태웠다고 했다. 이번 대량 질식사를 계기로 이슬람 분리단체인 PULO는 태국 군과 경찰의 무슬림에 대한 보복을 공언했다.

얄라, 파타니, 나라티왓, 사툰 등 말레이시아와 인접한 태국 남부 지역은 이슬람교도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1960~70년대부터 분리 움직임이 일었던 곳으로 '파타니해방단체연합(PULO)로 알려진 민병조직이 결성돼 있다. 그들은 중앙 정부가 자신들을 차별하고 있다고 비난해왔다.

실제로 태국 중앙정부는 1985년부터 10여 년 동안 10%의 경제성장을 보인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들 남부지역에는 거의 투자를 하지 않고 있으며 이 결과로 남부 3개 지역이 전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5%에 그치는 실정이다.

이러한 차별적인 정부의 태도와 강압적인 동화정책이 무슬림들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시키고 무차별적이고 비인도적인 공격이 그들의 보복을 부추기고 있다.

* 분리주의 세력은 누구인가?

타이주민의 80% 이상은 타이계 주민으로 상좌부불교도이다. 언어는 표준화된 샴어와 라오어․샨어 등이 있다. 타이족 이외에 가장 많은 사람은 중국인(화교)으로 300만 명을 넘었다. 다음은 말레이계 무슬림 파타니인으로 100만명을 상회하고 카렌족 등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으나 극히 미미하다.

타이 왕국에는 변경지대에 카렌족 등 산악 민족, 말레이인이 분포하고 있으나, 강력한 국왕 체제의 타이 왕국은 왕에게 복종하는 한 모두 신민으로 여겨 타이족으로 동화할 것을 강요하지 않아서 소수민족 문제가 존재하지 않았다.

1932년 쿠테타로 전제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바뀐 후에도 타이의 정치 지배의 정통성은 왕․불교(상좌부불교)․민족이 삼위일체인 국가 체제를 유지히였고, 소수민족 문제가 대두된 것은 1960년대 이후다.

파타니인의 분리 운동

․ 말레이인은 말레이시아 연방의 다수파 주민이며 국경을 마주하고 잇는 타이 남부 파타 니 지방에도 거주

- 말레이인이 사용하는 말레이어는 아우스트로네시아족에 속하며, 말레이시아에서는 말 레이어,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어라고 부르지만 양국 모두 국어로 사용

- 말레인 대부분은 무슬림

․ 타이족은 원래 말레이인의 거주지였던 말레이 반도로 남하해왔던 아유티야 왕조는 15세 기 중반 반도 남부에 있던 말라카 왕국을 공격

- 말라카왕은 1410년대에 이슬람으로 개종하였지만 왕족주변에 머무름. 왕국이 위기르 맞자 말레인의 이슬람화가 급진전

- 말라카왕은 아유티야 왕조에 대한 저항을 지하드(성전)으로 규정

- 아유티야 왕조 시대에 타이는 말레이 반도 북부를 지배하고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파타니 지방이 타이의 지배를 받은 시기는 챠크리 왕조 초기인 1785년임.

․ 파타니 왕국은 원래 남방에 있던 말레이인 이슬람국 조호르 왕국과 깊은 관계

- 현재도 파타니 지방의 파타니 지방의 말레이인은 말레이시아 연방의 북부주와 경제적 사회적 교류를 지속

․ 파타니 지방의 말레이계 무슬림은 파타니해방기구(PULO), 파타니민족해방운동(BRN) 드 의 투쟁조직을 만들어 무장 투쟁

- BRN은 1989년 12월 옥중에 있는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인질 유괴 작전을 전개 하고 PULO는 1992년 8월 국경 가까운 관광지 철도역에 강력한 폭탄을 설치해 70여 명을 살상

․ 파타니 지방은 타이 공산당 등 좌익 게릴라 조직의 활동 거점이기도 하여 타이 정부는 감시활동 강화와 함께 군대를 주둔

(6) 일반 태국인들, 승려들, 테러에 참여하지 않은 무슬림들의 입장

1. 남부지역 승려들

유혈사태가벌어진 사찰에 있던 승려들은 밤 12시쯤 20여명의 무슬림 복장을 한 사람들이 총을 들고 들어왔다고 했다. 절 곳곳에 불을 지르고 절을 부수는 행위를 하였다고도 밝혔다.1명의 승려와 3명의 사찰 사원들이 숨졌고, 그 외 부상자들도 있다고 했다.

총을 맞고 숨진 승려들은 모두 불태워 졌고, 현장은 매우 참혹했으며, 뼈 사이로 장기들이 노출되는 등 험악한 모습으로 죽어갔다며, 죽은 승려에 대한 애도를 표했다. 또한 이곳에서 부상당한 승려는 승려를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떠나기도 했다고 한다.

또 한 승려는 이런 일을 처음 당했지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하니, 참 두렵다고도 밝혔다. 사찰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범인은 이슬람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아 무슬림일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현장에 남은 지문을 채취한 결과 무슬림의 행위란 것이 밝혀졌다.

테러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승려들이지만, 곳곳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형상에, 모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고, 또 승려까지도 그만두고 떠날 만큼의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듯하다.

2.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무슬림의 입장

가난에 찌들어 살고 있는 것은 남부 무슬림들도 마찬가지이다. 남부지방에 사는 불교도와 무슬림 모두 가난에 찌들어 살고 있고 하루하루 연명하기조차 힘든 상황에 살면서, 정부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고 있다. 다만 남부지방에서 소수인 그들의 목소리는 낮을 수밖에 없었고, 요즘의 테러 분위기에 공포심을 느끼고 주눅 들어 살고 있다.

남부지방에서 소수로써 소외받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받고 있는 , 그래서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가지는 것은 무슬림이나 소수의 불교도 들이 마찬가지이지만. 불교도들은 윤회를 믿는 탓에 그 삶에 수긍하며 살기 때문이고, 무슬림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 아니냐는 의견을 표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삶의 어려움은 다 같지만, 무슬림이 좀 더 적극적이라는 의견을 표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한편으로는 두려움을 , 언제 다치거나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상황에 살지만, 내가 할일을 대신 해주는 그들에게 고마워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다. 일부 무슬림은 꼭 이렇게 까지 전쟁을 치르고 희생을 강요하면서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지만, 지금처럼 어려움이 계속된다면, 종교적인 신념을 떠나. 삶의 고통 때문에라도 이런 사태는 끊이지 않을 것 이라고 했다.

또한 무슬림 현지 주민들이 걱정하는 두려움은 다른 이유에서도 비롯되었다.

아무 이유 없이 테러범으로 오인되어 군경에 의해 희생당하는 경우도 흔하기 때문에 테러에 참여하지 않은 무슬림도 모두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무슬림 학생은 아무런 조사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잘못된 제보가 들어오더라도, 그 자리, 대로변 등에서 총살을 한다던지, 공터에서 축구하는 학생들에게도 무작위로 총을 쏘는 등의 군경의 태도에 불만이 많았다. 이런 것들 때문에 더욱도 군경이나 태국정부에 불만이 높아져 가고 있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살해하는 행위를 하면서, 점점 공포감이 높아지는 것 이라고 말했다.

3. 일반 태국인들

이 사태가 테러사태인 만큼 일반적인 태국인들의 살해 가능성과, 부상 가능성이 떠나지 않고 공포감을 조성하기 때문에 일반 태국인들도 편한 실정은 아니다. 또한 태국의 탁신 총리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고, 현재 군부로 인해 쿠테타가 일어나고, 이것을 국왕이 인정한 이 시점에서 태국인들은 현재의 어지러운 국정은 총리 때문이라는 편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또한 남부지역에 살고 있는 일부 불교도들의 태국인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총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내려앉는 등의 공포감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불안증 등의 정신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상태로 살고 있다.

또한 아이들은 이 공포로 인해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남부지역의 경제적상황이 넉넉하지 못하고, 이런 점에 늘 정부에 대한 반감을 가지던 사람들은 이 상황이 매우 슬프고 괴롭기만 하다. 반 태국인들은, 이번 쿠데타가 마무리 되어 총리가 바뀌고 정세가 안정되면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실현되기 까지 기다리는 것조차 힘들다고 한다.

또한 유혈 사태가 시작되면 , 임산부건 아이들이건 상관없이 목숨에 위협을 받고, 또한 안전조차 보장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피해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방도를 만들어보고 있지만, 그런 상황이 되면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기 때문에 늘 불안 속에 살아야 한다며 불만을 토했다. 불교도인 그들은 부처가 우리를 보호해 줄 것 이라며 밤낮으로 기도를 올리지만, 두려움까지는 없앨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어 긍정적인 상황으로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보인다면서 기대를 잃지 않는 사람들도 보였다. 현재의 새로운 총리와 바뀌는 자국정세가 이 사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희망을 가지고 있다.

(7) 쿠데타의 배경이 된 탁신정권과 군부세력의 정치적 갈등

이번 쿠데타가 일어난 배경에는 남부이슬람 지역 소요사태에 대한 손티장군(군부세력)과

탁신정권과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음을 간과 할 수 없다.

태국에서 4번째 부호이기도 한 탁신 총리는 1월 가족이 보유한 통신회사 ‘친 코퍼레이션’의 주식을 19억 달러에 매각하는 과정에서 세금은 한 푼도 내지 않아 대규모 탈세의혹을 받으며 사임위기에 몰렸다. 그러자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편법으로 지지 세력을 군부에 심는 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영향력 확대를 꾀했고, 자신에 대한 군 수뇌부의 암살 음모 설을 흘리며 군부 내 반대파 숙청을 기도해 군부의 반감을 샀다. 지난달 총리관저 인근에서 발견된 폭탄 차량 사건의 용의자로 장군을 포함, 군 고위간부 5명을 구금한 것도 군부와의 관계를 급격히 악화시켰다. 당시 경찰은 “배후에 4성 장군이 있다”고 밝혀 수사가 군 수뇌부로 향하고 있음을 시사했다.

이 와중에 군부 내 반 탁신 진영의 지도자급인 손티 장군이 탁신 측근의 중간급 장교의 절반인 129명을 무더기로 전보조치하면서 정부와 군부가 양립할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달았다. 또한 독실한 불교 신자인 탁신 총리는 무슬림 최초의 참모총장인 손티 장군과 이슬람 소요 사태를 놓고 빈번히 충돌했다. 손티장군은 2004년1월 이래 1400여명이 사망한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이슬람시민군과의 대화를 주창했으나 이는 어떠한 협상가능성도 무시하는 정부에 의해 결국 좌절됐으며 손티장군이 이슬람소요사태의 문제 해결을 위해 정부와 이슬람세력과의 대화를 계속 주장했으나 정부가 이를 거절했다. 이슬람 지역 소요사태에 대한 대응방안에 군부세력과 탁신정권의 의견충돌이 끊임없이 계속됐으며, 무슬림 최초의 육군참모총장인 손티장군은 태국 남부 무슬림 소요 사태 때마다 탁신 총리에 의해 종종 비판 받아, 특수부대 사령관 출신인 그의 전문성 또한 훼손되고는 했다.

결국 손티장군은 탁신총리가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에 머물러 있는 동안 기습적으로 거사를 감행해 국내통신망을 장악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의 주동세력은 계엄령을 선포하여 정부조직을 해산하고 헌법의 효력을 중지시켰으며 군 출신의 수라윳 출라농 장군을 태국의 새 총리에 임명되었다고 선포했다. 수라윳 신임 총리는 1일 취임사에서 "(정권의) 부정부패가 정치 문제와 태국 남부의 이슬람 분리저항활동 등 2가지 문제를 야기 시켰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민통합이 요구된다. 모든 사람이 문제 해결에 동참해줄 것을 촉구 한다"고 역설했다. 이 발표는 남부 이슬람지역 소요사태가 쿠데타의 주요 명분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전 탁신총리가 강경책으로 대응을 했다면 새로운 총리는 좀 더 평화적인 해결방안으로 남부 이슬람지역 소요사태를 해결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8) 태국-말레이시아 간의 관계

태국 남부 이슬람 지역 폭탄테러 사건을 둘러싸고 태국과 말레이시아 관계가 `삐걱'거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15일 얄라, 나라티왓, 파타니 등 태국 남부 3개 이슬람주에서 발생한 수십건의 동시다발적 폭탄 테러에 쓰인 폭탄이 말레이시아에서 제조됐을 가능성을 태국 각료가 제기한데 대해 말레이시아 정부가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를 겨냥한 콩삭 태국 내무장관의 발언에 대해서는 태국 정부안에서도 적절치 않았다는 반응이 흘러나왔다. 남부 이슬람 지역 안보 문제를 책임지고 있는 칫차이 와나사팃 태국 부총리 겸 법무장관은 15일 폭탄 테러에 사용된 폭탄의 국외 제조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시각을 보였다.

(9) 다른나라 분리주의 운동의 성격과 해결방법

1. 동티모르

동티모르란?

인도네시아(이하 인니)와 호주 사이에 있는 티모르섬의 동쪽 지역에 위치한 동티모르는 1701년 포르투갈이 티모르섬을 식민지로 편입시킨 후 1849년 네덜란드에 서티모르를 양도함으로써, 동티모르에 대한 포르투갈의 식민통치는 1975년 7월까지 지속된다.

분쟁의 원인

자원 확보, 정치 이념적 갈등, 그리고 종교적 반목 등의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기본적으로 동티모르 분쟁은 국내 일부 지방이 분리독립을 목표로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내전형 분쟁의 성격을 지닌다. 이들 분리독립운동은 석유 등 풍부한 부존자원에 비해 인니 전체 평균에도 훨씬 못 미치는 빈곤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현지 주민들이 중앙정부에 대해 정책적 소외와 강압 통치, 그리고 경제

착취 등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면서 발생되었다.

분쟁의 해결

국제적 쟁점으로 부각되면서 가능했다는 점, 그리고 국내투쟁과 국제여론 환기전략이 조직적으로 연계, 활용된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상당 부분 탈냉전의 국제적 영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제적 지원을 받는 내전'이었다.

또한 특이한 점은 독립파 저항군이 테러활동을 철저히 배격하였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내전형 분쟁에 있어서 민간인을 목표로 한 인질, 납치, 폭파 등의 테러활동이 빈번한 데 비해, 동티모르 저항군의 방어적 대응방법은 국제적으로 동정을 살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2. 남아공

남아공의 인종분규 원인

동 분규는 인종차별정책에서 기인한 소수 백인 지배층과 다수 흑인 피지배층간의 대립이다. 동 분규는 1910년 인종주의를 표방한 남아연방이 출범하고, 이에 반대하는 흑인 중심의 정당인 SNANC (ANC의 전신)가 조직되면서 시작되었다. 1948년 남아공 정부는 인종차별(Apartheid)을 공식 강령으로 채택하고, 1956년에는 만델라 등 흑인지도자들이 체포되고, ANC는 불법화되는 등 흑인에 대한 탄압을 지속하였다. 이에 반발한 흑인단체인 ANC, PAC은 1960년부터 본격적인 무장 게릴라전을 개시하였다. 냉전체제하에서 미국과 서방선진국들은 남아공의 인권문제 보다는 남부 아프리카 지역에서의 공산주의 확대를 억제하기 위해 남아공 정부를 지원하여 동 분규는 대외적으로는 무시되면서 대내적으로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미소간의 화해 분위기에 따라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남아공의 이념상의 이익보다는 전세계 여론의 비난이 되고 있는 흑인탄압정책에 보다 관심을 두면서 남아공에 대한 경제제재를 실시하는 등 사태의 변환을 가져왔다.

분쟁의 해결

국제적인 고립과 비난속에 1989년 취임한 디클라크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상황은 해결국면에 들어갔다. 디클라크 대통령은 만델라 등 흑인지도자의 석방, ANC의 합법화 승인, 인종차별법 폐지 등을 실시하고 범국민적 개헌협상회의인 민주남아공회의(CODESA)를 개최하는 등 획기적인 민주화 및 민족화합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1994년 4월 최초의 흑백동참 자유총선 실시되어 동년 5월에는 ANC의 만델라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만델라는 백인에 대한 보복을 실시하지 않고 흑백의 국민융화 노선을 추진함에 따라 80여년에 걸친 흑백 인종분규가 평화적으로 종결되었다. 만델라 대통령의 집권후 남아공의 정치는 국민융화노선하에서 안정된 체제를 지속하고 있다.

분쟁의 의미와 영향

동 문제가 국제사회 및 주변에 미친 영향으로는 상당히 크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남아공 백인 정권의 자세 변화는 국제사회의 경제제재가 갖는 실효성을 보여 주었고, 탈냉전 시대에는 이념보다는 인권이 중시되며, 흑백 지도자의 용단에 따른 타협은 세계 분쟁의 모범적인 해결 방안으로 자리메김 하였다. 또한 남아공 사태의 안정에 의해 나미비아 분쟁도 동시에 해결되었고, 만델라의 집권에 따라 남아공은 아프리카의 지역의 문제아에서 높은 도덕성을 지닌 지도국으로 탈바꿈하였다.

Ⅲ. 결론

뿌리깊은 지역적인 소외는 무슬림들의 분노를 폭발케 했지만 그건 종교가 달라서가 아니다. 그저 조금 더 잘 살고 싶어 하는 소수민 들의 거친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결코 무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따라서 태국 남부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슬림을 태국 국민으로 인식하고 그들의 종교적 특수성을 이해하고 무슬림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한 지역적 이해가 수반되지 않은 탁상공론식의 정책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무슬림의 입장을 이해하는 마음을 바탕으로 교육과 생활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비록 살기 위한 외침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과도한 폭력으로 변질되어 버린 남부 무슬림들의 목소리. 어느 한쪽의 잘못을 탓하기에 앞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수라윳 추대 총리가 취임한지 한 달이 되어간다. 이슬람 남부 사태를 국가적 2대 현안이라고 발표한 만큼 이 끊이지 않는 전쟁이 긍정적으로 해결되기 바란다.

출처 : 조선일보

대외경제정책 연구원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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