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영화 약사


부산외국어대학교 장미희

2001년 11월 부산 국제 영화제의 폐막작 <쑤리요타이>를 보면서, 태국 4대 여걸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했다는 것 이외에 그 영화는 물론 태국 영화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함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태국 영화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고 영화가 종합예술인 점을 감안하여 영화를 통한 태국 문화에 이해의 폭을 넓혀 보고자 한다.

1. 태국영화 약사

태국에서 영화가 최초로 공개된 것은 1897년이었다. 상영작은 <파리의 영화 Parisian Cinematorgaph> 였다. 방콕의 알란칸 극장에서 처음으로 상영된 이 영화를 보기 위해 600여명의 관객이 몰렸고 그들 대부분이 상류층이었다고 한다.
1900년에는 5대쭐라롱껀왕의 동생 싼파쌋 쑤파낃이 카메라를 구입하여 촬영을 실험했다.
1905년에는 흥행자본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다른 동남아 국가들의 영화자본의 출처가 중국계인 반면 태국 최초의 상설영화관을 설립한 것은 일본인이었다. 이에 자극을 받아 태국도 자국내의 영화자본으로 삐라까극장, 프린스극장, 쁘리다극장, 팓따나껀극장 등을 설립하였다.
태국에 미국영화가 처음 수입된 것은 1917년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유럽 영화산업이 원활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영화의 수입이 중단 되었기 때문이었다.
1924년에는 헐리우드에서 온 유니버설사의 감독 ‘헨리 맥래’가 왕립 철도회사 영화부와 함께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그린 < 낭싸오 쑤완 Miss gold >를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태국 최초의 장편 극화였다.
또한 이 시기 왕족이 설립한 싸얌 영화사(Siam Film Company) 는 외화 수입창구를 단일화하고 방콕의 20여 개의 극장을 인수하는 등 대 회사로 성장하였다.
1937년에는 파누판 유콘왕자와 헐리우드에서 영화 공부를 하고 돌아온 그의 친구들이 타이 영화사(Thai Film Company) 를 설립했다.
1950년대에 파누판왕자의 동생 바누유콘왕자가 설립한 아스윈사와 아누썬왕자가 설립한 라오사, 하누만사가 16mm 영화가 성행했던 당시에 35mm 영화제작에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1980년대에는 수상 끄리앙싹 차마난이 영화 수입관세를 50% 인하하여 헐리우드 영화가 태국 영화시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는 이제까지 태국이 헐리우드 영화에 대해 높은 관세를 책정하자 헐리우드의 수출협회가 대 태국수출을 금지 하였고, 영화관객이 급속히 감소하게 되면서 태국영화 산업에도 영향을 미친 사건에 대한 해결 정책이었다.
이처럼 태국 영화산업은 초반기부터 대부분 왕족의 후원 내지 직접 참여로 시작 되었고 그러한 경향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것은 1960년대 말레이시아 영화계가 정부의 보조가 없어서 유수한 영화사가 사라진 것과 비교해 볼 때 태국영화사에 있어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2. 태국의 영화 산업과 독립영화 (독립영화의 개념 정리는 별첨 참조)

영화계의 부흥을 꿈꾸고 있는 태국은 한때 세계 10위 권의 영화다량 생산국이었다고 한다. 1927년부터 1987년까지 60여년 동안 총 3000여 편의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1980년대만 보더라도 1983년-1987년 동안에 626편이 제작 됨으로써 연간 평균 125편의 영화가 제작된 셈이다. 1980년대 태국영화의 제작비를 보면 12만불 이상을 차지하는 부분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영화에 많은 자본이 투자된 것을 알 수 있다. <참고 그래프 1-1>

인력 상황으로 보면 전체 영화인의 약 20%가 대졸 출신으로 교육 수준은 비교적 높은 편이며, 현재 7개 대학에 영화 교육 과정이 있고 2개의 배우학교에서 연기를 가르치고 있다.
태국의 외화시장은 헐리우드와 홍콩영화가 다수를 점하고 있는데, 헐리우드의 메이저들은 1950년대부터 이미 방콕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했으며, 홍콩의 메이저들은 합작 사무실을 운영하였다.
한편 극장의 수는 1986년 1014곳에 달하고, 배급상태는 방콕은 직배를, 기타지역은 배급업자들의 간접배급 형태로 되어있다. <참고 그래프 1-2>

여기서 특이한 점은 농촌지역의 전기가 부족한 곳의 영화 상영이다. 농촌지역의 경우 아직도 상당지역 전기가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낭 카이야’라고 하는 약장수 극장을 볼 수 있다. 놀이동산과 포장마차 곁에 들어선 태국의 야외극장은 사람 키 만한 스피커를 앞세우고 영화를 보여준다. 스피커의 성능에 따라 야외극장에 대한 관심이 달라진다. 신문지를 깔고 앉는 자리는 무료다. 스크린은 얇은 천을 사용해 뒤에서도 볼 수 있게 되어있다. 이런 편안하고 단순한 장치는 태국에서는 영화가 마치 먹고 마시는 즐거움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는 느낌을 준다. 더위를 이기느라 웃통을 벗어 제치고 마치 집에서 TV를 시청하듯 가로 누워 영화를 즐기는 태국 사람들, 그 사이로 맨발의 아이들이 끊임없이 돌아다닌다. 비록 여기 토토는 없지만, 이탈리아영화 <시네마 천국>에 뒤지지 않는, 태국인들의 낙천성이 짙게 배인 영화 천국이다. 야외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주로 홍콩의 액션물이나 코미디인데, 그 중에서도 10대를 겨냥한 하이틴 영화가 가장 인기가 있다.

조재홍의 세계 영화기행1

오늘날에도 태국에서 흔히 인식되어온 흥행의 필수요소는 빅 스타를 기용하는 것인데, 1980년대 이후 최고의 스타로는 싸라퐁 찯뜨리, 짜루니 쑥싸왓을 꼽을 수 있다. 1970년대 대표적 스타였던 쏨받 메타니는 한해에 60편의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대 스타들의 겹치기 출연은 자연 신인들의 등장을 제약했고, 불성실한 연기를 낳기도 하였다.
이렇게 대중위주 영화의 팽배 속에서도 비교적 진지하고 의식 있는 독립영화는 1970년대 중반 이후에 등장 했는데, 이들 독립영화의 등장은 1973년 학생운동을 기점으로 전개된 민주화 운동과 반민주 군부 독재와의 충돌, 그에 따른 사회의식의 고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73년 ‘피의 일요일 사건’ 등의 민주화 현상은 태국사회의 민주화-반 민주화 과정을 거치게 했고 이런 일련의 결과로 독립영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유명한 독립영화 감독으로는 찯뜨리찰름 유콘과 첟 쏭씨 그리고 마높 우돔뎃과 같은 인물이 있다.
1970년대 격변기에 왕자의 신분으로 독립 영화를 이끈 찯뜨리 감독은 영화사를 운영했던 어머니에게서 영화적 소견을 물려 받았다. 미국 UCLA에서 지질학과 영화를 공부하며 포드 코폴라, 로만 폴라스키 같은 저명한 감독과 친교를 맺었다. 귀국 후 방송국 연출자로 일하다가, 1972년 데뷔, ‘모텔 천사(Thepthida Rongraem)-1974, 택시운전사(Thongphun Khokpho)-1977로 새로운 태국 영화의 기수로 등장했다. 그는 폭력과 빈곤 등의 사회문제를 영상에 담아오면서 민족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나는 존경 받을만한 민족주의자는 아니다. 뇌물거래, 부정부패, 매춘문제, 에이즈, 밀림도벌, 해양오염 같은 소재들을 다루고 그것들을 민족적인 관심에서 풀어 나갔기 때문에 그런 평가가 있는 모양이다. 앞으로도 그런 작업을 계속할 생각이니 그런 말은 들어도 어쩔 수 없지만, 나는 민족이라는 좁은 틀보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는 보편적인 관심사를 표현하고 싶다.”-<찯뜨리찰름 유콘 감독> [자료 3]
왕족이면서 사회 비판적인 영화를 지향하는 찯뜨리감독은 제작비도 자비를 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또한 그는 2001년 태국 내에서 약 210억원(약7만 바트)의 돈을 벌어들이고 태국영화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쑤리요타이>의 감독이기도 하다.

또 한 명의 독립영화 감독으로 윧타나 묵다싸닏이 있다. 찯뜨리의 조감독으로 일하다가 1978년 데뷔한 그는 <바 21의 천사>에서 1970년대 독립영화 영향의 정형을 보여주었다. 방콕의 유명한 환락가 팓퐁을 배경으로 , 바의 여인 린다가 겪는 고통을 담고 있다. [자료5]
첟 쏭씨 역시 빠뜨릴 수 없는 독립영화 감독의 하나이다. 그는 뮤지컬에서 세미다큐멘타리까지 다양한 형식의 실험을 행하면서 현대화에 밀려 사라져 가는 과거의 전통과 관습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930년대 배경으로 가난 때문에 부잣집으로 팔려간 애인을 잊지 못해 불행하게 되는 젊은 남녀의 사랑을 그린 1977년 작품 <옛 상처 Plae Kaow>는 1981년 낭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하였다.
마높 우돔뎃 감독은 1981년 스물 여섯의 나이로 16mm 영화 <소외된 사람들 Prachachon Nork>을 만들었다.

“이 영화를 만들 당시 태국 사회는 정부와 농민의 대립상황으로 국민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국왕의 권위를 뺏으려는 군인들의 독재정치 시대였다. 걸핏하면 반공을 내세워 시민을 억압했다. 나는 정부가 옳지 않다고 믿었고 그래서 사회 문제점을 영화로 만들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도 나는 그런 자세로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 마높 우돔뎃 감독
부조리한 사회구조와 관료들의 부패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는 <소외된 사람들>은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는데도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져 관심을 끌었다. 그의 진지한 사회의식은 이 영화가 1981년 런던 영화제에서 상영됨으로써 세계 영화계에 알려졌으며, 그 후 낭트 영화제와 홍콩 영화제에 잇따라 소개되어 마높 감독은 해외에 널리 알려진 태국의 영화감독이 되었다.
“내 작품은 한번도 흥행에 성공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대중이 좋아할만한 흥행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다. 내가 코미디나 하이틴 영화(태국에서는 저 예산과 스타급의 배우의 기용 그리고 심각한 영화를 지양하는 관객들로 인해 하이틴 영화가 매우 인기가 있다.)를 만들 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영화들은 내가 아니어도 다른 감독들이 많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관객들이 보지 못하던 영화를 선물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늘 생각하고 애쓴다. 종교, 민주주의 제도, 풍습 등에 관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찾아낸다. 내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그렇게 찾아낸 나의 지식과 경험을 많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1970년대 독립영화 감독들은 현재의 많은 감독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어쩌면 그것이 지금 태국영화가 다시 부흥할 수 있도록 해준 밑거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료6]

3. 태국영화의 현재와 미래

1970년대부터 등장한 독립영화가 그 진지함과 일부 관객의 성원에도 불구하고 태국 영화계를 압도할 만큼 활성화되지 못 했다. 갈수록 관객들은 진지한 영화를 멀리하고 독립영화들은 제작기회가 적어져 영화 문화에 불균형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관객을 TV와 비디오에 뺏기고 하이틴 영화가 주류를 이룬다.

낙관적인 측면도 있다. 과거보다는 발전된 영화 기술과 높은 수준의 인력들은 태국 영화계의 잠재적인 힘을 보여준다.
현재 태국 영화계를 이루는 영화 감독들은 대개 세 계층으로 나뉘어 진다. 광고계에서 영화계로 진입한 사람들로 논씨 니미붓(<댕 버럴리와 그의 일당들>, <낭낙>, <짠다라>), 펜엑 랃따나루앙(<검은 호랑이의 눈물>), 옥 사이드 팡(<달리는 사나이>, <방콕 데인저러스>)이 속한다. 광고 화면에 익숙한 이들은 영상 디자인에 있어서 탁월한 감각을 보인다. 이와 달리 연기와 편집을 강조하는 펜엑의 영화는 전통적인 내러티브 관습을 파괴하는 실험적 형식을 띠고 있다. 이들은 헐리우드 영화와 태국 고전 영화 기법을 접목해 새로운 영화의 틀을 만들어 냈다. 특히 논지 감독의 <낭낙>은 1999년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많은 관객들의 관심을 모았다고 한다. 태국인들의 피(귀신)나 콴사상, 업과 같은 태국사회의 전통의식을 볼 수 있었던 영화였다. 악귀를 물리치기 위한 싸이씬도 나타났는데 이 영화 역시 태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전설로 식상할 수 있는 소재를 논지 감독 특유의 영상미로 관객들의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이다.

[자료 1, 2]
또 하나의 부류는 영화산업의 팽창으로 제작편수가 늘어나자 다시 영화계로 돌아온 중견감독들이다. 앞서 언급한 <쑤리요타이>의 감독인 찯뜨리찰름 유콘 감독과 <방라짠>의 타닏 찓따누꾼 감독으로 이들은 “이전부터 관객의 영화라는 매체를 다루어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감정을 주무르는데 능숙하다.”라는 평을 듣고 있다. 세 번째 그룹은 97년까지 하이틴 물을 만들고 자리를 못 잡다가 최근 다양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감독들이다.[자료 4]
2001년 태국 영화계의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는 시대물 제작이 유행처럼 번졌다는 사실이다. <쑤리요타이>와 <방라짠>이 흥행에 성공하자 제작자들은 다른 태국 영웅이나 신화를 찾아 나섰다. “일부 조그만 영화사들이 아류 작을 내놓기도 한다. 큰 제작자들의 경우, 흥행성도 있고 작품성도 있는 소재를 찾다 보니까 그렇게 됐을지도 모른다. 사실 시대적인 소재를 다룰 경우 이미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광고하기 쉽다. 익숙한 이야기니까 관객들이 영화를 볼 때 별다른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심각하지 않고 또 관객에 쉽게 접근해야 하는 태국 영화 소재의 부족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태국 영화계에서 부족한 것은 소재뿐 아니라 주제의식의 결여에도 있다.
“태국 이야기를 헐리우드 식으로 표현하거나 헐리우드 이야기를 태국 영화 속에 구겨넣었을 뿐이다. 태국의 영혼은 찾아볼 수가 없다. B급 영화 역시 태국 영화계가 안고 있는 문제이다.” ? (안찰리 교수-태국 영화계에 관한 책을 집필중임)
그 외에도 검열문제, 불안정한 투자구조, 전문적인 영화 인력부족과 같은 문제들이 많다. 그럼에도 1997년 이후 눈부신 성장과 변신은 태국 영화 발전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으로 태국 영화의 전체적인 역사와 시대를 지나오면서 변화해 가는 성향, 그리고 현재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의 영화 제작열기와 그 속에 뒷받침된 유수 영화 감독들의 역할을 알아보았다. 이 글을 준비하면서 느꼈던 것은 태국 영화에 대한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차라리 인도나 중앙아시아의 경우 영화제작이 활발한 편이라 자꾸 그 쪽으로 눈이 가기도 했었다. 비주류 영화자료가 많다는 해운대의 ‘씨네마떼끄’도 가보았지만 서적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 동안 태국과의 문화 교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일 수 도 있지만 돈이 되는 선진국형 블록버스터에만 집중하는 한국 영화산업의 현실이 아쉽게 느껴졌다. 관객을 위해서도 영화계의 질적 발전을 위해서도 흥행보다는 수준 높은 예술영화의 대중화에 힘썼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지속적으로 태국영화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 갈 생각이다.

<별첨> http:// my.dreamwiz.com. 한국영화 100년사

독립영화

▶ 우리의 단편영화와 독립영화의 약사는 매우 짧다. 독립영화란 기본의 영화산업계에서 활동하는 영화사와 계약을 맺지 않고 독자적으로 예산을 마련하여 제작하는 영화를 총칭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같이 영화업계의 메이저 시스템이 없는 풍토에서는 넓은 의미로 볼 때 거의 대부분의 영화를 독립영화라고 볼 수도 있다. 할리우드와 같이 종합적인 제작 시스템과 체계적인 배급기구를 갖춘 영화제작사는 없기 때문이다.

▶ 엄격한 의미에서는 독립영화는 영화사적으로 볼 때, 1920년대 유럽에서 일어난 전위영화(Avant-grade Cinema)를 비롯하여 실험영화(Experimental Film), 또는 언더그라운드영화(Underground Film), 확대영화(Expanded Film)등을 총망라하는, 일종의 영화운동이라 하겠다. 이들 영화는 영화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기존 상업영화의 미학적 기능이나 작가적 경향과는 차별된다는 점에서 다르게 분류될 여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러한 영화사적 기원과 배경에서 벗어나 일반 개인들 또는 동호인 모임 등에서 지원되고 제작되는 영화를 독립영화라 일컫게 되고, 또한 오늘의 독립영화는 사적 영화(Personal Cinema), 반 상업적 영화(Non-commercial Film)등의 개념을 포함한다.

▶ 우리나라에서는 독립영화, 단편영화, 소형영화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이후부터라고 하겠다. 영화촬영 기자재의 소형화로 우선 16mm, 8mm 영화들이 아마추어 동호인들간에 유행하기 시작했고, 비디오 카메라의 출현도 큰 몫을 했다. 대학의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만든 영화가 출현했고, 이러한 단편, 다큐멘터리, 소형영화들이 학생운동과 연계되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화들은 주로 40분을 넘지 않는 단편영화였지만, 학생들의 영화에 대한 열기는 대단하였고, 젊은 세대들에게 영상이 갖는 호소력과 매력을 체험하게 하고 주입시키는 데 큰 구실을 했다.

▶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 통일운동 등을 고취시켰던 학생운동과 더불어 독립영화의 기초가 다져지게 된다. 이러한 독립영화 계열은 그 내용이 담고 있는 바와 같이 저항적이며 반 상업적이고 더러는 급진 이데올로기에 물들어 있는 것들도 있었지만, 민주화, 노동, 환경, 교육문제, 인간성 회복 등의 메세지도 담겨 있었다. 당시 이들의 영화제작과 일반 대중공개는 영화법상 용인되지 않았기에 이들 영화는 법적 마찰을 일으켰고, 장산곶매 같은 제작사는 1993년 3월 대법원에 의해 무 등록 영화제작이라는 유죄판결을 받게 된다.

▶ 그러나 모든 영화들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독립영화 형태의 제작 수련을 통해 영상의 문법을 터득했으며,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학 영화에서 활동했던 유능한 인재들이 제도권 영화계에 진출하여 주목할 만한 가능성을 보이기도 했다. 장선우, 이정국, 변영주 등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참고자료>
아시아 영화의 이해(주윤탁, 김지석 책임편집-1993)
인디컴의 세계영화기행1(조재홍 지음, 인디컴 엮음-1997)
프리미어 2월 호 태국영화 특별기획 기사
http:// my.dreamwiz.com. 한국영화 100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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